‘오키나와 전쟁 체험 구전 활동’ 소개 Introducing the activity of “Handing down WW2 experience in Okinawa”
여러분 반갑습니다. airi입니다.
저는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교육관계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첫 블로그에서는 대학시절 활동에 대해 적어보려고 합니다.
저의 활동은 16살 때 오키나와 전투를 경험하신 할아버지의 전쟁 체험을 구전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airi입니다.
저는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교육관계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첫 블로그에서는 대학시절 활동에 대해 적어보려고 합니다.
저의 활동은 16살 때 오키나와 전투를 경험하신 할아버지의 전쟁 체험을 구전하는 일입니다.
원문: 일본어 원문 게시일: 2015년 9월 25일 번역자: rion 유대인이 구출된 장소 중 하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영사관 건물(카나우스시, 리투아니아) 9월 4일, 리투아니아의 카나우스에서 1940년에 ‘생명의 비자’라는 통과 비자를 발급하여 6,000여명의 유대인을 구한 스기하라 치우네(杉原千畝)를 위한 기념 플레이트가 공개되었다. 위험한 시기에 1940년 8월 28일의 일입니다. 리투아니아가 소련령이 된지 4개월 째. 이미 소련 사회주의 공화국이 된 리투아니아에서는 이전 공화국의 증거가 은폐되고, 영사관과 대사관이 폐쇄되던 시기였습니다. 그 결과, 1939년부터 리투아니아에 지어진 일본 영사관도 문을 닫고, 스기하라 영사는 9월 4일에 리투아니아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를 떠나기 전……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점령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하였습니다. 나치스의 유대인 대량 학살 계획은 폴란드계 유대인의 코앞까지 바짝 다가왔습니다. 이때 […]
원문: 일본어 원문 게시일: 2015년 8월 29일 번역자: rion 리담의 1940년대 전쟁을 테마로 한 페스티벌은 이 지역이 직접 운영하며, 지역 전체가 협력하고 있다. 이전 블로그에서 설명한 전투 재현 장소와 상업 구역은 해변 근처의 잔디밭에 설치되어 있다. 이 지역의 중심가로 돌아가 상점들의 쇼윈도로 눈을 돌리거나, 거리를 걷는 1940년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1940년대 분위기에 젖어들 수 있다. Lytham 1940s War Time Festival was organized and cooperated by the town. Those battle re-enactment field and commercial area were located on the grasses by the sea. However, when you went back to the town main street, you could also immerse yourself in the mood of 1940s by looking at shop […]
원문: 일본어 원문 게시일: 2015년 8월 26일 번역자: rion 8월 16일, 날씨가 어제보다 좋아져 기분 좋은 오후, 리담의 1940년대 전쟁을 테마로 한 페스티벌에 들렀다. On the 16th of Aug, the weather improved and I popped in the Lytham 1940s War Time Festival. 어제 만난 폴의 설명에 따르면, 전투를 재현하는 장소와 ‘영리 목적’ 구역이 구별되어 있다고 하였다. 1940년대를 테마로 한 ‘영리 목적’ 구역은 어떤 곳일까. 먼저 회장 전체의 부스들을 대강 둘러보았다. 부스들은 당시 유행했던 여성용 드레스, 장식된 모자와 액세서리를 팔거나, 병사의 군복과 헬멧까지 있었다. 큰 부스에서는 당시 유행했던 음악까지 흐르고 있었다. 이 구역은 그야말로 축제같구나. 방문자들이 즐길 수 있는 분위기이다. Paul indicated that battle re-enactment field was divided from […]
원문: 일본어 원문 게시일: 2015년 8월 24일 번역자: rion 운이 좋게도 이 군복을 입은 사람, 폴은 역사를 가르치는 사회과 선생님으로, 내가 알기 쉽게 전쟁의 재현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가 입고 있는 것은 독일군 병사의 군복으로, 오후에 영국, 미국, 독일팀(군?)의 전투를 재현한다고 한다. 이 모의 전투의 주목적은 전쟁을 재현함으로써, 예를 들면 그의 학생들이나 젊은 세대들이, 전쟁에 대해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렇구나, 체험학습과 같은 것이구나. 다행이다’, 라고 생각한 것은 2차대전 중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적이었기 때문인데, 이 페스티벌에 다소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던 나는 이 말을 듣고 안도할 수 있었다. 그는 교육적인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대해 개방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 말에 공감하면서 […]
원문: 일본어 원문 게시일: 2015년 8월 23일 번역자: rion 올해 8월 15일, 나는 북잉글랜드의 리담이라는 마을에 체류 중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일. 올해는 종전 70주년을 맞이하는 해. 나는 영국 사람들이 이 날을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만약 내가 일본에 있었다면, 지자체의 스피커를 통해 종전 기념일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나는 일하던 손을 멈추고, 묵념을 하며 히로시마, 나가사키, 오키나와 전쟁과 원자 폭탄의 희생자들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무슨 일을 겪었을지는 한정된 범위에서 상상할 수밖에 없겠지만. This year I happened to be in Lytham, the north of England, on the day of Aug 15. The end of WW2. This year is 70th year since the war ended. I was wondering […]
원문: 일본어 원문 게시일: 2015년 8월 23일 번역자: rion 얼마 전, 증조부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일본에 있는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증조부는 페루에 정착한 일계 1세입니다. 증조부의 추도 미사를 간단히 드리고,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일본을 떠나 먼 땅 페루에 도착하였을 증조부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100년도 더 이전에, 겨우 100달러라는 돈을 손에 쥐고, 배를 타고 페루로 건너온 증조부. 이국땅에서 이발소를 세곳이나 운영하였던 증조부. 수많은 역경을 경험했을 증조부를 온 가족이 함께 떠올렸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을 시절, 전쟁이 일어나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힘든 일도 겪었을 것이고, 지금만큼 생활도 풍요롭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인종 차별도 더 심했을 것입니다. 증조부가 만약 일본에서 머나먼 페루까지 떠나오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일계인이 […]
원문: 일본어 원문 게시일: 2015년 7월 11일 번역자: rion 리투아니아에서 유명한 유대인의 리스트를 정리하는 것은 힘든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명한 유대인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리투아니아에 존재했던 많은 유대 문화 유산은 지금은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 글을 통해 몇 명의 유대계 리투아니아인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리투아니아를 살아온 유대인들의 삶과 건물이나 기념비를 통해 이미 사라져버린 문화적 유산을 상상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Elijah ben Shlomo Zalman: 빌나 가온. 빌뉴스의 가온이라고도 한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탈무드, 카발라 등의 전문가 Joe Slovo: 조 슬로보. 남아프리카 공화국 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 차별 정책) 세력의 주요 활동가 중 한 사람으로 넬슨 만델라와 함께 복역 Danielius Dolskis: 20년대와 30년대에 […]
원문: 일본어 원문 게시일: 2015년 7월 6일 번역자: rion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리투아니아의 소수 민족(ethnic minority) 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이 유대인 커뮤니티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한편, 독립된 리투아니아 시대(1918-1940)에는 유대인 문화가 번성하였습니다. 수도 빌뉴스는 폴란드에게 침략당하여 1919년부터 1939년까지 폴란드령으로 지배를 받았지만, 그 시기에도 빌뉴스의 유복한 유대인의 유산은 계속해서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1926년부터 리투아니아는 일당제(*단일 정당제)를 채택하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유대인이 적극적으로 중앙 정부에 참여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다른 유럽 국가와는 달리 문화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자유로웠으며, 사회로부터 단절되지 않고 리투아니아 사회 속에서 공생할 수 있었습니다. 리투아니아 유대인의 대부분이 사용하던 언어는 러시아어, 이디시어, 리투아니아어로, 총 세 개의 언어였습니다. 이디시어 신문도 출판되어 지역에 따라서는 이디시어로 표기한 가게 […]
원문: 일본어 원문 게시일: 2015년 7월 2일 번역자: rion 이렇게 중국 문화가 아직도 살아있는 나가사키(長崎)에서, 화교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나가사키 짬뽕의 고안자, 진 헤이준(陳平順, 천핑순)씨의 증손자이며, 나가사키의 유명한 중화요리점 ‘시카이로(四海楼)’의 대표, 진 마사츠구(陳優継)씨가 저술한 책 ‘짬뽕과 나가사키 화교(ちゃんぽんと長崎華僑)’(2009)에는 나가사키 화교의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인구의 약 1/6이 중화계인 시대도 있었던 나가사키지만, 일본 에도시대 말인 1858년 안세이(安政 ※번역자주: 일본의 연호)의 개국으로 요코하마(横浜)와 하코다테(函館)가 개항된 후, 나가사키는 일본 유일의 무역항으로써의 특권을 잃게 되었다. 무역의 중심은 동쪽으로 이동되고, 나가사키 화교의 수는 점점 줄어 갔다. 토진야시키(唐人屋敷)는 폐허가 되고, 화재로 인해 불타버렸다. 나가사키의 중국인은 토진야시키 앞바다를 매립하여 만든 조성지 ‘신치(新地)’로 이주하게 되었다. (p. 14) (요코하마 항이 개항되었을 무렵의 그림. 외국 선박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