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그리고 다문화 공생(1) Okinawa and Multiculturalism (1)
원문: 일본어
원문 게시일: 2014년 7월 25일
번역자: rion
일본 오키나와 나하(那覇)의 국제거리를 걸으면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일본 본토에서 온 여행객들, 현지 오키나와 사람들, 해외(특히 아시아)에서 온 여행객들. 나하에서 조금 떨어진 미군 기지가 있는 마을로 가면, 미군 병사들도 많이 있다. 남국의 태양 아래 산신(三線)의 노래가 평온하게 흐르는 거리. 새파란 하늘에 흰 적란운이 또렷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오키나와는 다양한 문화가 혼재하는 다문화 공생의 모델과도 같은 곳이다.
이번에 대학 동아리 연수로 일주일 동안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다양한 활동을 하였는데, 그 중 하나로, 현지 학생 단체와 함께 후텐마(普天間) 미군기지의 이전 장소로 주목받고 있는 헤노코(辺野古)를 방문하여, 항의자들과 함께 카누를 몰았다. 그리고 폭염 속에서 캠프 슈와브 앞에 앉아 시위에 참가하였다. 미군 병사 성폭행 사건이 발생한 장소에도 가보았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생각한 것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먼저 연수를 통해 전체적으로 느낀 것은 오키나와는 제2의 하와이, 괌과 같다는 것이다. 원래 다른 나라였지만, 무력으로 제압되어 식민지화 되었다. 종주국에 편입되면서도 주(州)의 자격을 얻지 못한 ‘준주(準州)’로 취급되었다. 군대의 기지가 집중되어 있고, 교육의 폭은 좁으며, 임금은 압도적으로 낮다. 빈곤 문제도 크다. 젊은이들은 미래의 기회를 찾으러 본토로 유출되고 있다.
오키나와는 근세까지 중계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한 ‘류큐왕국(琉球王国)’이었는데, 근대에 들어서면서 메이지(明治) 정부의 ‘류큐처분’에 의해 정식으로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 황민화정책으로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 말을 사용하면 그 벌로 ‘방언찰(方言札)’이라는 꼬리표를 단 역사도 있다. 전쟁 중에는 오키나와 땅에서 격전이 펼쳐지고, 패전 후 1972년까지 미국의 통치를 받았다. 현재 재일 미군기지의 75%가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미군기지에 반대하는 일부 현지인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도쿄 정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오키나와의 최저 임금은 일본 국내에서도 꽤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계속)~